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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플로렌시아]]는 철강을 연간 2천만 톤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에는 3천만 톤까지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평]]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우리는 철강 4천만 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게 된다. 올해 우리는 520만 톤을 생산했고, 앞으로 5년 뒤에는 1천만~1천5백만 톤, 다시 5년 뒤에는 2천~2천5백만 톤, 또 5년 뒤에는 3천~4천만 톤에 이를 것이다. 지금 내가 다소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를 가진 자신감이다. '''[[북산]]의 동지들이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15년 안에 우리 또한 [[플로렌시아]][* 당시 랜드 경제 순위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물론 ([[청평]]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플로렌시아는 아직 [[제2차 랜드 대전]]의 전후 복구 단계였고, 배급제가 [[1954년]]에 들어서야 폐지될 만큼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다.]를 추월할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청평 공산당 지도부]]의 교시 청평 지도부는 늦게나마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설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식량을 비축하고 이를 해외로 수출하였다. 일례로 1959년, 청평은 대도시 주민 전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비축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량을 외화 확보 명목으로 수출해버렸다. 그 결과 베르샤, 띠에우리엔, 남강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식량 공급이 끊겼고, 1960년 한 해에만 수천만 명이 배급을 받지 못했다. 배급 상황은 참담하여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100g이 고작이었으며, 곡물은 턱없이 부족해 영양실조와 부종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부종 환자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어야만 황두와 흑설탕을 소량 배급받아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청평 지도부는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한 규모의 군사력 증강을 계속했다. 핵 개발, 대규모 병력 유지, 신형 무기 도입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었으며, 동시에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원조와 동맹 지원에도 돈과 곡물을 쏟아부었다. 지도부는 이미 1958년부터 식량 부족 현상을 보고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멈추지 않았고, “희생은 필연적”이라는 구호 아래 인민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강요하였다. 대약진 운동 이전 청평은 사비에트를 본보기로 삼아 국가 운영 전반을 설계했다. 지도부는 “사비에트가 짧은 기간 안에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변모했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 실제로 수많은 설비와 기술자가 사비에트에서 유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청평의 초기 산업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1950년대 초반, 청평은 연 20%의 성장을 목표로 내세우며 사비에트에 수백 개 산업 플랜트 건설을 요구했으나, 당시 노스탈린은 이를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간주하고 절반 이하로 줄여 승인했다. 청평 지도부는 불만을 품었지만, 노스탈린의 권위 앞에서는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대신 경제 관료들은 균형재정과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현실적 정책을 병행했고, 그 결과 제1차 5개년 계획은 연평균 9% 성장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비에트가 여전히 압도적 군사·경제 대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청평은 ‘2위 국가’로 고착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북산이 루이나의 지원을 받아 공업화를 가속화하는 모습은 청평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지도부는 “플로렌시아를 7년 안에 추월하고, 15년 안에 루이나를 따라잡겠다”는 과격한 구호를 내걸었다. 안정 성장을 주장하던 경제 관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낙인이 찍혀 자아비판을 강요당했고, 청평은 점차 무리한 속도전과 과잉 목표로 나아가게 되었다. 당시 청평의 경제는 전후 복구와 안정 성장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산업 기반이 약해 여전히 농업이 중심이었다. 다른 서방국가들도 전쟁 후유증에서 막 벗어난 시기였기에 경제 발전의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도부는 이를 간과한 채 무리한 속도전을 추진했다. 플로렌시아는 여전히 전후 배급제를 시행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청평은 이를 추월의 기회로 착각했다. 그 결과 철강 생산 목표를 5년 뒤 1천만 톤, 10년 뒤 2천만 톤, 15년 뒤에는 4천만 톤으로 설정하는 등, 현실과 괴리된 수치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사실상 국가적 허세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청평을 단순히 ‘인구만 많은 나라’에서 벗어나 단기간에 공업을 육성해 “국제사회에서 큰소리치는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제는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안정된 기반 구축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여 속전속결식 대책을 남발했다는 것이었다. 전시행정이 난무하며, 무리한 증산 운동과 허위 보고가 체계적으로 만연하게 되었다. 결국 1968년 산업생산량이 단기적으로 50% 이상 급증하는 호조를 보였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했다. 1969년부터 아사자가 속출했고, 연이어 발생한 흉작은 농업 생산량을 10년 전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저질 공산품과 소비재가 넘쳐나 국방력마저 약화되었으며, 곳곳에서 배급이 끊겨 전국 인민은 건국 직후보다도 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이렇게 대약진 운동은 청평을 고도 성장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북산을 견제하려는 조급한 경쟁심과 지도부의 오만 속에서 인류사 최악의 기근과 경제적 퇴보를 초래하였다. 개발도상국의 선도국을 자처하던 청평은 오히려 플로렌시아를 따라잡기는 커녕, 유고랜드에까지 추월당하며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회복되지 못한 치명적 상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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